금산의 문화유적-천년고찰 금산 보석사(寶石寺)
천년고찰 금산 보석사(寶石寺)
조선시대 불상 중 으뜸, 목조 석가여래 삼존좌상
금산 보석사 대웅전
보석사 대웅전 보석사는 신라 헌강왕 11년 885에 조구 선사가 창건하였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창건 당시 절 앞에서 캐낸 금으로 불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절 이름을 보석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금산보석사전경1
기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타 없어진 절을 조선 고종 19년 1882에 명성황후가 다시 세웠으며 1912년 31 본산의 하나가 되어 전라북도 일원에 있는 33개의 말사를 관장했다.
석동리 마을 사람들 말에 의하면 현재 보석사가 있는 곳으로부터 200m 위에 있는 영천암 자리가 원래 보석사의 절터였다고 한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산신각·의선각·조사당·응향각·요사채 등이 있다. 절 입구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 승장이었던 영규대사의 순절비가 있으며 그 옆에는 1980년에 임창순이 역술하고 이곤손이 쓴 영규대사의 선각비가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로 웅장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금산 보석사 목조 석가여래 삼존좌상 보석사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은 중앙의 석가 여래불과 좌우 협시보살로 이루어진 목조 석가여래 삼존좌상을 모셨는데 조각수법이 섬세하고 상호가 자비로워 조선시대 불상 중에서도 으뜸이다.
이 불상은 전형적인 17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이는 작품으로 단정한 인상에 신체는 균형 있으면서 안정감이 있다. 석가 여래불은 오른쪽 어깨를 살짝 덮은 편단 우견의 법의를 입고 있으며, 깨달음에 이르는 순간을 상징하는 항마 촉지인을 맺고 있다.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모두 손에 연꽃 가지를 들고 있으며,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서로 다르다. 문수보살의 배 부분과 양 무릎에는 장식이 새겨져 있다.
진영각은 휴정, 유정, 영규의 영정을 모셨는데 최근에 영정을 도난당했다고 한다. 의선각은 의병 승장 영규가 계룡산 갑사와 보석사를 오가며 수도할 때 머물던 건물이다. 영규대사는 조선 선조 25년 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을 모아 조현과 함께 왜군에 맞서 싸웠다. 청주성을 탈환하고 금산에 이르렀으나 8월 18일 왜군과 격전 끝에 순절하였다. 의선각은 맞배지붕에 정면 3칸, 측면 1칸 건물로 창녕위 김병주가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보석사 의병승장비는 충남 공주에 있는 청련암과 보석사에서 무예를 배운 뒤 임진왜란 때 왜병과 싸우다가 전사한 영규대사의 순절비로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없애버렸던 것을 정요신이 찾아 다시 세웠다고 한다.
이와 함께 금산 보석사는 은행나무로도 유명하다. 금산 보석사 은행나무는 높이 40m, 둘레 10.4m, 천연기념물 제365호로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 때 소리를 내어 운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신목으로 믿고 있으며 나무의 나이는 1,000년으로 추정된다. 금산군에서는 매년 단옷날 은행나무 대신제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