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 증언] 6.25때 금산군 남일면 음대리로 피신했던 딘 소장이야기
6.25 전쟁 당시 딘 소장을 10여 일간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집 광(창고)에 숨겨준 금산군 남일면 음대리 강복헌 씨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무력남침으로 동족끼리 싸워 수많은 전사자와 실종자를 낸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대한민국 역사 기록되어 있는 625 전쟁 당시 미 육군 소속 딘 소장이 북한군에 납치되는 사건이 있었다.
6.25 전쟁 중에 대전서 후퇴하던 중 길을 잃고 부대와 홀로 떨어져 낙오된 뒤 금산군 남일면 음대리 강복헌 씨 집 광에서 10여 일간 피신했던 이야기를 당시 딘 소장 일행을 만났던 남일면 음대리 김원규(87세) 노인회장으로부터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이야기를 엮어봤다.
당시 16세였던 김원규 노인회장은 처음 딘 소장일행을 만났던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행색은 거지꼴로 지칠 대로 지쳐 길옆에 반쯤 기대어 누워있던 4명의 딘 소장일행은 군복은 곳곳이 찢기고 헤질대로 헤졌고 머리카락은 길어 헝클어져 있었으며 옷사이로 드러난 팔과 가슴, 얼굴은 수염과 털로 뒤덮여 있어 마치 죽은 송장 같은 몰골로 귀신같아 보였다고 회상했다.
다음은 6.25 전쟁 발발 후 7월 경 대전서 대구방향으로 후퇴하던 중 길을 잃고 본대와 떨어져 낙오한 딘 소장이 남일면 음대리에서 10여 일간 피신했던 일화를 김원규 노인회장과 일문일답으로 알아봤다.
▲딘 소장과는 언제 어디서 만났나요?
김원규 노인회장=1950년 7월 초순쯤 강복헌 씨집 광(창고)에서 처음 봤다. 그때 4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사람의 형체를 알아볼 수없을 정도로 머리가 길고 헝클어져 있었고 면도를 안 해서 수염도 많이 길었다. 옷은 찢어지고 해져서 마치 몰골이 귀신같아 보였다. 강복헌 씨가 보리밥을 갖다 줘도 잘 먹지 않았고 껍질을 벗기지 않고 삶은 감자를 소금에 찍어서 조금씩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미 육군 소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나요?
김원규 노인회장=나중에 카츄사로 군대에 입대했었는데 그때 강복헌 씨 집에서 피신하고 있었던 미군 중 한 명이 미 7사단 사단장이었다고 들었다.
▲딘 소장 일행이 얼마 동안 마을에 피신해 있었나요?
김원규 노인회장=제가 알기로는 7월 초순쯤 와서 약 10여 일 넘게 강복헌 씨 집에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 이후 본대가 있는 대구 쪽으로 가기 위해서 영동 쪽으로 길을 나섰다가 무주 적상면 쪽에서 최 씨라는 사람의 밀고로 진안 상전면서 인민군에 잡혀갔다고 들었다.
▲딘 소장을 피신시켰던 이야기를 해주세요.
김원규 노인회장=딘 소장 일행을 만나기 며칠 전에 음대리 마을 앞을 지나가는 미군들을 봤는데 성한 사람이 거의 없었고 부상을 입어 다리를 절뚝거리고 다른 군인에게 의지해서 간신히 솔재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을 봤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아마도 후퇴하는 병력이었던 같다. 그때도 마을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감자를 삶아다 주었는데 소금에 찍어 먹는 것을 봤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딘 소장 일행을 10여 일만 더 숨겨주었더라면 아마도 강복헌 씨는 영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동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딘 소장이 혹시 음대리 마을을 찾아왔거나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나요?
김원규 노인회장=없었던 것으로 안다. 음대리 마을에서 본 곳이 마지막이었다. 진안 쪽에서 인민군에 잡혀간 뒤로는 소식을 전혀 알 수가 없었고 전쟁이 끝나고 포로교환 때 석방된 것으로 뒤늦게 알았다.
▲회장님 수고 하셨습니다.
아래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일보 출신 원로 언론인 문창재 칼럼니스트가 쓴 "미 사단장 딘 소장 실종사건" 이란 제목의 글 중 일부를 발췌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이 참전, 인민군 남진을 저지시키기 위해 항공편으로 보낸 스미스 부대는 7월 5일 오산 전투에서 참패했다. 뒤따라온 미 24사단 역시 평택-안성 저지선, 천안 저지선, 금강 저지선에서 차례로 밀려 ‘대전 사수’가 급선무가 되었다. 워커 8군 사령관은 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에게 7월 20일까지 대전을 지키도록 지시했다. 포항에 상륙할 해병 1사단을 추풍령 전선에 배치할 시간을 벌어달라는 것이었다.
야크기 지원을 받은 적 제3, 제4사단이 경부 축선을 따라 밀물처럼 치고 내려왔다. 교통의 요지인 대전은 옥천 유성 논산 금산 조치원 등 5개 지역으로 분기되는 도로망을 갖고 있어 수비 병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딘 장군 요청으로 최신형 대전차포가 왔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병력도 턱없이 부족했다.
병력 부족에 지리가 어둡고 훈련이 되지 않은 부대는 지휘관들까지 앞에 나서야 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천안전투에서 34연대장 로버트 마틴 대령이 전사하자, 딘 장군은 바주카포를 메고 일선으로 달려갔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서 용명을 떨친 이 포병 전문가는 직접 바주카포를 쏘아 적 전차를 파괴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이었다. 병력을 가득 태운 트럭들이 전차를 앞세우고 대전 시내로 들이닥쳤다.
시가지 혼전 중에 그의 사단은 통신장비마저 불통 되어 부대 간 연락이 끊겼다. 원래는 지연 작전이 19일 밤까지로 예정되었지만, 하루가 연장되었다. 20일 악전고투 끝에 연락병을 투입해 철수 명령을 내린 딘 소장은 인접 병력을 모아 50여 대의 차량 편으로 철수 길에 나섰다.
바로 이때 돌이키지 못할 실수가 발생했다. 운전병이 옥천-영동 방향으로 좌회전해야 할 길을 지나쳐 남쪽으로 계속 달린 것이다. 그리고 곧 첫 번째 위기가 닥쳤다. 길가에 매복했던 적의 공격으로 대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딘 소장은 몇 사람의 대원과 함께 산속으로 피했다. 그중에 부상병이 포함되었다.
부상병이 심한 갈증을 호소하자 딘 소장은 물을 찾아 계곡 아래로 내려가다 아래로 굴러떨어져 의식을 잃었다. 기다리다 지친 대원들이 떠나고 나서야 의식을 되찾은 그는 혼자 산야를 헤매었다.
그러다가 역시 혼자가 된 동료를 만나 함께 행동했다. 산짐승이나 다름없는 도피 생활이었다. 낮에는 자고 밤에 별자리를 보고 동쪽으로 간다는 게 제자리를 뺑뺑 돈 적도 있었다. 허기를 달래려고 밭에 버려진 날감자를 먹고, 갈증이 나면 빗물을 마셨다. 그게 탈이 되어 심한 이질을 겪기도 했다.
그러다가 천사를 만났다. 전북 무주군 적상면 한 농가에 들어가 배가 고프다는 시늉을 하자, 집주인(박종구)은 음식을 차려주고 정성스레 돌봐주었다. 그 집에서 이틀 밤을 자고 길을 나섰다가 악마를 만났다. 키 작은 중년 남자 둘에게 대구까지 길 안내를 해 주면 100만 환(1,000달러 상당)을 주겠다고 제안하자, 그들은 “오케이!”를 연발했다. 그들을 따라가다가 10여 명의 청년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불문곡직 딘 소장을 결박해 진안군 어느 파출소로 끌고 갔다. 미리 신고를 했던 모양이다.
포로가 된 딘 소장은 전주를 거쳐 대전으로 압송되었다가 평양으로 끌려갔다. 국군의 북진 때는 북한의 임시수도 강계(江界·평북)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포로 신문 과정에서 신분을 감추느라 심한 고초를 겪었다. 44시간 잠을 못 자게 하는 고문도 당했다. 90㎏ 가깝던 거구가 58㎏이 되었을 정도였다.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