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의 역사유적> 금산군 금성면 양전리
의병장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선생 순절비
고경명 선생비각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33년(중종 28)∼1592년(선조 25)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 광주 압보촌(鴨保村) 출생. 고자검(高自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좌랑 고운(高雲), 아버지는 대사간 고맹영(高孟英), 어머니는 진사 서걸(徐傑)의 딸이다.
의병장 고경명선생 순절비
1552년(명종 7) 사마시에 제1위로 합격, 진사가 되고, 1558년 왕이 직접 성균관에 나와 실시한 시험에서 수석해,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받았다.같은 해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고, 이어서 공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형조좌랑·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호당(湖堂)에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940년 일제의 만행으로 파괴된 것을 보관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금산에 주둔한 왜적을 유인하여 금성면 파초리 눈벌싸움에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제봉 고경명 선생의 순절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8호(1984.05.17 지정) 이다. 전라도 출신의 의병장인 고경명 선생의 순절비가 여기에 세워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1592년 임진년(壬辰-) 일본의 조선 침략으로 한반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4월 13일 경상좌수영을 궤멸시킨 왜군은 부산에 상륙하여 부산성을 침공·함락시키면서 파죽지세의 승기로 서울까지 함락시키기에 이른다.
개전 한 달도 안 돼 왜군에 밀려 왕마저 도성을 버리고 피란길에 오른 조선은 온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당시 금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호남 침공을 목적으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주력부대가 금산성을 함락시키고 주둔하면서 전주성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임진왜란은 조선 전국토를 황폐화시키고 수많은 의병과 승병, 관군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임진왜란은 구국충절에 불타는 조선의 전쟁영웅들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선비로 하여금 칼을 들게 했으며 살생을 금하는 승려들까지 창검을 들게 했다. 금산에서는 의병장 중봉 조헌과 제봉 고경명, 의승장 영규대사가 금산성 왜군을 상대로 절치부심, 구국의 일념을 불태우고 있었다.
본래 고경명선생은 고향인 장흥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더욱이 임금인 선조가 파천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격분함을 참지 못한 선생은, 큰 아들 종후와 여주인 김천일, 담양부학유 유팽노 등을 찾아 상의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마침내 임진년 7월 9일부터 10일까지 이틀에 걸쳐 의병장 제봉 고경명이 항적필사의 전투를 벌인다. 7,000의병을 이끌고 전라도방어사 곽영의 군대와 합세하여 ‘금산성전투’를 일으켰던 것. 전주성을 함락시켜 호남을 점령하려는 왜군 주력부대의 야욕을 막고 빼앗긴 성을 탈환하고자 왜군이 주둔하고 있는 금산성 탈환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작전은 실패로 끝나고 고경명은 순절하고 만다.
첫날 금산성 외곽을 장악한 고경명이 성 안 방어전을 펴는 왜군에게 피해를 입히며 승기를 잡았으나 총공격을 감행한 둘째 날 전세는 역전됐다. 의병은 서문을, 관군은 동문을 치기로 하고 시작된 둘째 날 전투는 동문을 열고 나온 왜군이 관군을 격파하고 의병을 연이어 공격하면서 의병의 전열은 무너지기에 이른다. 전투는 패색이 짙어갔지만 항적필사의 일념으로 적과 맞서는 고경명에게는 후퇴란 없었다.
금산성전투는 비록 패배로 끝났지만 왜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힌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이 금산성전투를 벌이게 된 것은 여산을 지나면서 들은 소식 때문이었다. 근왕을 위해 7,000 의병을 이끌고 서울로 가는 도중 여산에 이르렀을 때 금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왜병의 주력부대가 전주성을 치고자 진군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였다. 왜군에게 있어서 호남감영이 설치되어 있는 전주성이 함락되면 호남을 장악하는 교두보가 될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임진년 7월 10일 금산성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의 숭고한 죽음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효종때 금산군수 여필관이 비문을 지어 세운 순절비는 1940년 일제의 만행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1952년 후손들이 여필관의 비문을 다시 새겨 복원한 비를 1962년에 석조비각을 조성하여 현재 보존하고 있다. 파괴된 비석의 파편은 석조비각 옆에 전통양식의 비각을 짓고 그 안에 정리하여 보존하고 있다. 순절비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그가 전사한 곳의 건너편 산기슭이다.
한편 고경명은 1558년(명종 13년)에 문과에 장원한 후 중요한 직책을 두루 거쳐 동래부사에 이르렀는데, 서인(西人)이 몰락할 때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담양에서 6,000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은 근왕을 위해 서울로 올라가면서 전주에 이르러 7,000 의병으로 세를 늘렸다.
그는 시·글씨·그림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시문집인 『제봉집』, 속집(續集)·유집(遺集), 무등산 기행문인 『서석록(瑞石錄)』,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正氣錄)』이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출처] 고경명선생비각-충청남도 금산
장성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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