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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중앙신문

금산의 역사 인물 『박힐』

by JSS열린세상 2018. 1. 10.

금산의 역사 인물 박힐

1370~1429 향년59세 본관 반남 박씨

 

남일면 마장리 숭모사와 삼세충의비

高麗末 사람으로 박힐朴詰의 자는 원직 는 도소재逃召齋이며 반남 박씨 6세손으로서 문정공 상충의 조카 상경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文科에 급제를 하고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과 친교가 두터웠다.

 

고려가 滅亡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여 朝鮮王 태종이[이방원] 몇 차례나 찾아가 벼슬에 나오기를 간청 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도소재라는 호를 내리고 그 동네 이름을 濟用洞이라 부르게 하였으며 物品田畓을 하사하였으나 받지 않고 不事二君忠血을 지켜 錦山 군 남일면 마장리로 隱居은거하였다.

 

박힐의 증손자 또한 의율재擬栗齋 朴麟박린은 초산군수로 재임하던 중 단종이 폐위되자 금산 장평으로 은거하여 단을 쌓고 단종이 자객에 의해 죽은 음력 1024일 통곡하여 세사를 모시며 지냈다.

 

박린의 아들 임회당臨淮堂 朴希權 역시 사헌부감찰로 있던 중 世祖의 찬위소식을 듣고 영월로 달려가 모시려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457년 단종의 승하소식을 들은 뒤 고향 집 후원에 을 쌓고 매년 祭享을 올려 절의를 지켰다.

 

반남 박씨는 忠南 錦山郡 南一面 일대에 世居하고 있으며 박희권의 6대 손 박지영 등 일부 후손들이 임진왜란 때 전북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로 이주하여 문중 후손들과 후학들의 교육에 힘을 썼다 후학들과 후손들이19597월에 入銅鄕祖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맛배 지붕 사당을 지어 숭모사라 짓고 三世忠과 박지영을 추배하여 음력 315일 향사하고 있다.

 

1812[순조12] 무주군 안성면 오도산 아래 道山祠를 창건하고 三忠을 배향하였으나 1868년 고종1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현재 금평리 두을 마을 입구에 三世忠義碑閣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 당시 무주군 안성면은 금산군에 속해 있었다]

 

금산군에서는 남일면 마장리 840번지에 1915년 지방유림과 후손의 정성으로 崇慕祠숭모사를 건립하여 도소재 박힐, 의율재 박린, 임회당 박희권의 삼세충의 위패를 모셔놓고 매년 음력 1024錦山 儒林과 박씨 문중에서 享祀하고 있으며 단종의 세사를 모시던 이 지금도 남아있다

우리고장에 三世忠이 난 것은 後代에 길이 남을 敎訓이며 박씨 문중의 榮光이라고 생각한다. [향토유적 제6호로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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