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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중앙신문

<독자칼럼>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대한 이야기-김덕환 前 금산경찰서정보과장

by JSS열린세상 2019. 3. 15.

<독자칼럼>김덕환 前 금산경찰서정보과장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대한 이야기


리더의 가장 중요한 덕목(德目)은 언행(言行)의 합리성(合理性),


즉 언행일치(言行一致)에 있다. 말과 행동의 일치(一致)는 두 마음이 아닌 한 마음일 때만 가능(可能)하다해서 수신(修身)의 필요조건(必要條件)은 마음을 올바르게 다잡는 것이다.

 

한편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이중 격물(格物)에서 정심(正心)까지가 빠져 있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이후에 해당하는몸이 다스려지면 집이 다스려지고, 집이 다스려지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지면 천하가 다스려진다(身爲而家爲, 家爲而國爲, 國爲而天下爲)’라는 말이 나오는데 표현(表現)은 다르지만 결국은 같은 말인 걸로 보아 전국시대(戰國時代) 당시에는 교양인(敎養人)의 상식(常識)이 아니었나 보여 진다.

 

대학(大學)이건, 여씨춘추(呂氏春秋), 다 같이 단계성(段階性)을 매우 강조(强調)하고 있고, ()나라 임금이 첨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묻자 단계를 무시한 임금의 질문이 불쾌한 첨자가 퉁명스레 나는 내 몸을 다스리는 방법밖에 모르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들어본 일이 없소 라고 내 뱉았을 만큼(여씨춘추) 반드시 순서(順序)에 입각(立脚)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사물(事物)에 대한 분명한 인식(認識)과 개념(槪念)이 정립(定立)이 안된 사람이 집안을 다스리려하면 불화(不和)가 일어나는 법이며 집안이 화목(和睦)하지 않는데 그를 덕()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와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4가지 행실(行實)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따라서 이들의 순서(順序)가 어떠하냐가 관건(關鍵)인데 대체로 작은 범위(範圍)의 분야(分野)로부터 차례대로 성취(成就)시켜야 하는 것으로 간주(看做)하기가 쉽다. (앞의 문장은 그러한 순서에 따라서 나열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을 그 순서(順序)대로 이루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4가지 행실(行實) 가운데 수신(修身)만은 일단 지켜야 한다고 보지만 그 외에의 경우, 성취(成就)시키는 것이 이상적(理想的)일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반드시 지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모두 유가(儒家)의 목표(目標)이며 덕목(德目)일 뿐이다.

 

다른 항목(項目)들도 그러하지만 수신(修身)이나 제가(齊家)의 한계(限界) 어디까지인가가 심히 불분명(不分明)하다.

    

()를 들어 제가(齊家)의 한계(限界)에 대해서 언급(言及)해 보면 과연 제가(齊家)의 한()어디일까 ?

 

단순히 결혼(結婚)하는 것만으로 제가(齊家)를 성취(成就)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고, 자녀(子女)를 낳고 경제적(經濟的)으로 안정(安定)이루면서 자녀(子女)들을 잘 양육(養育)하고, 부부간(夫婦間)에 금실이 좋아 서로 화합(和合)해야 (옛날 이라면 부모도 효성스럽게 모셔야 되고 일가친척들 간에도 화목해야 한다) 제가(齊家)라고 할 수 있겠다.

 

각각(各各)의 한계(限界)가 대단히 고차원적(高次元的)이라고 한다면 수신(修身)하는 것만으로도 일생(一生)이 모자랄지 모른다. 언제 수신(修身) 끝내고 제가(齊家)를 하며 제가(齊家)를 끝내고 치국(治國)을 하며 치국() 끝내고 평천하(平天下)할 수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특히 현대(現代)에 이러한 모든 조건(條件)을 충족(充足)시키고 이어 치국(治國)하고 평천하(平天下)할만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

그야말로 인생(人生) 짧은데 할 일은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순서(順序)가 논리적으로 필연적(必然的)인 것도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차례(次例)대로 성취(成就)시켜나가는 것이 이상적(理想的)이라고 보지만 평천하(平天下)위해 가정(家庭)을 돌보지 못할 수도 있고 치국(治國)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본다. 또 치국(治國)을 위해 제가(齊家)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역사적(歷史的)으로 이러한 순서(順序)를 유감없이 성취(成就)시키면서 평천하(平天下) 아니 치국(治國)이라도 한 사람이 있었을까? 결코 없는 것으로 생각 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불가능(不可能)한 것이기 때문 일 것이다.

 

대학(大學)은 중국(中國) 고대(古代) 철학서(哲學書)로서 4(四書) 중의 하나이다. 몸을 닦아 천하(天下)를 다스리는 원칙(原則)을 기술(記述)했다.

 

원래 예기(禮記)의 제42()이었는데, ()나라 주자(朱子)가 원문(原文) 순서(順序)를 고쳐 전문(全文)을 경()과 전()으로 정리(整理)하고, 또 명명덕(明明德), 신민(新民), 지지선(止至善)의 세강령(三綱領)과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8조목(八條目)의 체계(體系)를 세워 대학장구(大學章句) 지어, 그 해석(解釋)이 유행(流行)했으나, () 나라 왕양명(王陽明)은 이에 대하여 원문(原文)에 복귀(復歸)할 것을 주장(主張), 대학고본방주(大學古本旁注)를 지었다.

 

중국(中國)에서 유교(儒敎)가 국교(國敎)로 채택(採擇)된 한대(漢代) 이래 오경(五經)이 기본(基本) 경전(經典)으로 전해지다가 송대(宋代)에 주희(朱熹) 당시 번성(蕃盛)하던 불교(佛敎)와 도교(道敎)에 맞서는 새로운 유학(性理學) 체계(體系)를 세우면서 예기(禮記)에서 중용(中庸)과 대학(大學)두 편을 독립(獨立)시켜 사서(四書) 중심의 체재(體裁)를 확립(確立)하였다.

 

49편으로 구성(構成)된 예기(禮記) 중 제42편이 대학(大學)에 해당한다.

주희(朱熹)는 대학(大學)에 장구(章句)를 짓고 자세한 해설(解說)을 붙이는 한편, 착간(錯簡:책장 또는 편장의 순서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았다.

 

그는 전체를 경()1, ()10장으로 나누어 경()은 공자(孔子)의 사상(思想)을 제자(弟子) 증자(曾子)가 기술(記述)한 것이고, ()은 증자(曾子)의 생각을 그의 문인(門人)이 기록(記錄)한 것이라고 하였다.

 

대학(大學)의 저자(著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전통적(傳統的)으로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이 공자(孔子)의 손자(孫子)인 자사(子思)가 지었다는 견해(見解)가 지배적(支配的)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대해서는 여기까지만 살펴보고 요즘 부모(父母)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과 자기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 한다.

 

아무리 세상(世上)이 바뀌고 수백 번, 수만 번 바뀌어도 부모 없는 자식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진리(眞理)이고 철칙(鐵則)이거늘 어찌하여 자식이 부모를 학대(虐待)하고 폭행(暴行)을 하고 무시(無視)를 하는지 아무리 이해를 하려해도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자신도 훗날 자기의 후손들로부터 존경(尊敬) 받고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다.

 

혹여 자신의 나약함을 부모(父母)를 탓하거나 남을 탓하여 자식(子息)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다면 지금이라도 생각(生角)을 바꿔야 한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子息)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가 ?

이 세상 모든 부모님들은 자식(子息)을 위해서라면 자신(自身)의 몸이 부서지는지도 모르고 헌신(獻身) 봉사(奉仕)한다.

 

그런 부모의 마음도 모르고 부모님들에게 막말과 거친 행동(行動)을 하는 것은 큰 업을 지어 차후에 본인(本人)이 고스란히 받는 것이다

 

혹여 자신(自身)의 가난함과 어려운 처지를 부모(父母)를 탓하거나 자신의 나약함을 극복(克服)하지 못하고 부모 탓을 한다면 토끼의 이야기를 생각(生角)하며 세상을 다시 돌아보기를 권한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난(家難)한 것을 부끄러워하고 무식(無識)한 것을 ()으로 생각하고 못생긴 얼굴을 탓하는 사람같이 무능(無能)하고 못난 사람은 없다. 비록 생활이 빈곤(貧困)하다하여 마음까지 빈곤(貧困) 것이 아니며 배움이 부족(不足)하여 무식(無識)하다고 양심(良心)마저 무식(無識)한 것이 아니요 얼굴이 밉다고 생각하여 마음씨까지 미운 것이 아니다

 

얼굴이 예쁘고 미모(美貌)가 아름다운 사람은 자기만족에 도취(陶醉)되어 방자(放恣)함이 스며들지만 얼굴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자신을 낮추며 산다.

 

가난(家難)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은 돈을 주어도 돈보다 귀한 보화(寶貨) 주지 않는다고 불평(不平)을 하나 가난한 사람은 조그마한 도움에도 감격(感激)을 하고 겸허(謙虛)한 마음을 가진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은 음식의 맛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밥 한 숟갈이 입에 들어가는 그 자체가 바로 생명(生命)의 환희(歡喜)와 기쁨이 되는 것이다

 

목마른 자에게 물 한 모금은 천하(天下)에 감로주(甘露酒)로서 모래알로 황금(黃金)을 맛보는 것과 같으며 자갈로 옥()을 만드는 묘미(妙味)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많이 배운 사람은 유식(有識)함을 뽐내며 거만(倨慢)하기 쉬워 자기의 분수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으나 무식(無識)한 사람은 자기의 무식(無識)부끄러이 여기여 언제나 낮은 자세로 임하고 모든 사람을 존중(尊重)하고 우러러 보며 감사(感謝)하는 마음을 가진다.

배움이 많다고 잘난 것이 아니요 똑똑한 것이 아니다 비록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얼마나 삶을 충실(忠實)하게 살고 있으며 또한 얼마나 인간답게 삶을 살았느냐 그것이 중요하고 그렇게 충실(忠實)하며 인간답게 삶을 살아간 사람이 진정 위대(偉大)하고 훌륭한 사람이다.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생활이 괴롭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괴로워지고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끝없이 불행해지고 슬프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관(人生觀)이요 도덕관(道德觀)이며 삶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眞情)하고 냉철(冷徹)한 나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렇게 슬프고 괴롭고 불행하여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며 그러한 자신을 발견하려면 스스로 자신을 지배할 줄 알아야 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을 지배(支配) 할 줄 알아야 남을 지배 할 수 있으며 자신을 지배하려면 쉽게 흥분(興奮)하지 말고 침착(沈着)한 마음부터 가져야 한다.

 

즉 병()이 들면 조용히 누워서 안정(安定)을 취하듯 솟아오르는 흥분(興奮)조용히 가라앉히고 감정(感情)을 추스르는 것이 바로 자신을 지배한 것이다 자신의 가는 길이 험하다고 포기하면 한발자국도 옮기지를 못한다.

 

또한 내가 불행(不幸)하다고 생각하면 평생(平生)을 가도 행복 할 수가 없다 행복(幸福)이라는 것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기에 나에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보는 어려운 것을 쉽게 생각해서 실패(失敗)하고, 현명한 사람은 쉬운 것을 어렵게 생각해서 실패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사람은 어리석은 듯이 보이면서 속내는 현명(賢明)해야 성공하며 나를 지배하고 남을 지배하는 것이다.

내가 초라하고 내가 빈곤(貧困)하다 생각하기 전에 나보다 못한 사람들이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한번쯤 생각하여 나의 생활이 얼마나 행복한 생활인지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

 

사람은 모두가 만족한 행복이라는 것은 없다.

보이지 않는 불행(不幸)은 누구나 있는 것이며 오히려 가진 자와 풍요로운 자가 불행은 더욱 많다는 것을 생각하고 세상에는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위안(慰安)을 가져야 한다.

 

어느 날 토끼들이 모여 세상을 비관(悲觀)하는데 우리는 세상에서 너무나도 약한 존재(存在)다 그러기에 모든 동물(動物)들이 우리보다 강자(强者)이기에 날마다 우리를 공격(攻擊)하니 그들의 손에 죽기 전에 차라리 우리 모두 한꺼번에 물에 빠져 죽자고 의결(議決)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모두 강가에 죽으러 가는데 마침 강가에서 한가롭게 놀고 있던 개구리들이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강물에 뛰어들어 몸을 숨기니 풀밭에 있던 벌레들이 놀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강물에 물고기들마저 덩달아 비상()이 걸려 쏜살 같이 도망쳤다고 한다.

 

이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토끼 한 마리가 풀벌레와 물고기는 물론이고 개구리를 가리키며 외친다.

 

여러분 !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이 세상에 우리보다 더 약한 동물(動物)이 여기 있습니다.

 

여기에 많은 동물들이 우리보다 더욱 무서움을 타면서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 같은 강자(强者)가 세상을 버린다면 어디 살아남을 짐승이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모두들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다 토끼들이 자기보다 못한 풀벌레들을 생각 못하고 자살(自殺)하려 했던 것은 자신들이 마음이 스스로 만들어 내듯 사람이 살면서 느끼는 고통()과 불행(不幸)은 나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기에 마음을 평화롭게 가지고 어려움이나 고통(苦痛)같은 것들을 겁게 맞아드려야 하며 즐겁게 맞아드리려는 마음들이 사람을 바르게생각 하게 들고,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人間)을 현명(賢明)하게 만들며 현명(賢明)해 진다는 것은 인생(人生)을 지혜롭게 살도록 만드는 것 이다.

 

결론(結論)

인생(人生)은 생각(生角)하기 나름 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처지가 지금당장 어렵다고 하여도 부모(父母)를 탓하여 부모에게 함부로 행동(行動)을 한다거나 인생(人生)을 포기(抛棄)하여 자살()을 하지 말기를 바란다.

 

자살(自殺)을 할 용기(勇氣)가 있다면 그 죽을힘을 다하여 용기를 가지고 세상을 살아보라 세상(世上)에는 당신을 기다리는 곳이 곳 처에 널려있으나 당신의 노력(努力) 부족(不足)으로 당신이 그곳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부모에게 효()를 다하지 못하고 함부로 하는 사람들도 개구리 올챙이 적을 생각해서라도 부모(父母)에게 효를 다해라

 

그러면 당신들에게도 세상은 희망(希望)과 복()을 전해주는 날이 있을 것이다. 흥부전에서 흥부에게 제비가 박 씨를 물어다 준 것 처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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