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장성수열린세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금산중앙신문

태봉재에 묻어놓은 왕도의 꿈 태조대왕 태실 [太祖大王胎室]

by JSS열린세상 2018. 4. 4.

태봉재에 묻어놓은 왕도의 꿈 태조대왕 태실 [太祖大王胎室]


만인산 태봉재에 있는 태조 이성계 태실


유형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된 태조대왕 태실은 현재 충남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 산 1-108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조 제1대 왕인 태조 이성계의 태(胎)를 봉안한 석실이다.
 
조선태조 5년에 건축 되었으며, 태조 이성계의 태를 처음에는 함경도 본궁의 용연(龍淵)에 안치하였다가 무학대사의 지시로 금산군 추부면 만인산에 옮겨 안치하고, 태실비를 세웠다. 1928년 조선 총독부에서 태 항아리를 창경원으로 옮겨간 후 석비와 석조물만이 남아 원형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파손.산재되어 있었으나, 1993년 현 위치인 추부면 마전리 산 1-66번지에 복원하였다.



태실은 팔각형으로 돌 난간을 두른 정역(淨域)을 만들고, 그안에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태실 구조로 되어 있다. 그 앞에는 구부(龜趺) 위에 태실비가 있으며, 전면에는 "태조대왕 태실"이라는 비문이 음각 되어 있다. 태를 봉안한 후 만인산을 태봉산으로 부르게 되었고, 현재는 충청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13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태조이성계 태실이 있는 만인산


태실이란 왕이나 왕실 자손의 태를 모셔두는 작은 돌방으로, 이것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1335∼1408)의 태를 모셨던 곳이다. 8각을 이룬 태실은 바깥으로 8개의 기둥을 둔 돌난간을 둘렀다. 받침부와 몸돌, 뚜껑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돌 안에 있었던 태항아리는 1928년 조선총독부에서 창경궁으로 옮겨 갔다.


바로 앞에 서있는 태실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형태로, 비몸에는 ‘태조대왕태실’이라고 새겨 놓았다. 이 태실은 맨 처음 함경도 용연지역에 두었다가,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대사의 지시로 충남 금산의 만인산으로 옮겨 비를 세워 놓았다. 이 후 그곳의 토지소유자가 자신의 조상묘를 두기 위해, 태실의 석물들을 헐어 약 100m쯤 떨어진 곳에 옮겨 놓아 새로이 복원, 수리를 거쳤다.


인삼고을의 관문이라 할 태봉재는 말 그대로 금산과 대전을 잇는 탯줄같은 존재이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개통됨에 따라 그 역할이 좀 무뎌지기는 했어도, 지난 한 세기 동안 태봉재는 금산의 유일한 관문 노릇을 톡톡히 했다.


태봉에 길이 열힌 것은 일제 강점기에 신작로가 난 이후이다. 이때부터 금단의 영역이었던 태봉은 자동차와 뭇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고개로 변모했다. 널리 알려진대로 만인산 태봉은 태조 이성계의 태가 안치된 곳이다.


따라서 개국이래 줄곧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남아있었고, 나라의 봉산(封山)으로 지정되어 수호를 받아왔다. 때문에 아무리 연료가 귀해도 그 주변에서는 화목을 채취하지 않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한다.


문헌에 나타난 태조의 태실은 이성계의 태를 만인산에 안치한 것은 태조가 즉위한지 2년째 되는 1393년이다. 태조는 무학대사의 말을 듣고 고향인 함흥땅에 비장된 태를 만인산에 이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가봉에 의한 것이기는 하나 천리길이 넘는 변방으로 태를 옮긴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필시 어떠한 곡절이 숨겨져 있거나 왕실 차원의 비결이 없다면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문헌 기록에 의하면 이성계의 태실에 관한 초기의 기록은 『태실실록』과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후 편찬되는 각종 지리지와 읍지에는 만인산 성봉(지금의 정기봉)에 대한 기록이 추가로 등장는데 전문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태조 2년(1393) 계유년에 태조의 태실을 안치하고 진산군을 지진주사(知珍州事)로 승격했다. 태종13년(1415)에 다시 군으로 개칭했다.” 세종실록지리지』(1454) 군의 동쪽(만인산) 20리에 성봉(星峯)이 있는데 땅이 후박하고 물이 깊으며, 봉우리가 기이하고 수려한 것이 연꽃과 흡사하며 이곳에 태조의 태를 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신증동국여지승람』(1481~1530)


용담답산기에 이르기를, (태실지에) 천마기(天馬旗)가 창을 세워 놓은 형태로 안석되어 있었다. 옛날에 담양 세성인(世性人) 전추 (田秋)라는 사람이 그 지총(地塚) 위에 집을 짓고 밭 아래 동네에서 풍족하게 살았다. 태조 등극2년 호우 계유년(393)에 군사람 진순도(陳舜道)가 그 위(태봉)를 점복했다.

 

태조가 처음에 소문을 듣고 기이하게 여겨 재신(宰臣)과 더불어 지관(地官)을 파견하여 그것을 보고 오도록 했는데, 지관이 산 위에 이르러 점 지하여 말하기를, ‘아름답도다(佳哉). 이는 만세의 터로구나!’ (此萬世之基也)하고 탄복하여 태를 봉하도록 했다. (중략) 이에 태조가 상을 내려 진순도를 임주사(林州使)로 삼고, 전추 역시 회인현감에 봉하여 전택(田宅)을 하사했다.(중략)


위의 기록에 의하면 태봉의 본래 주인은 전추라는 인물이고, 그위를 다시 점복한 사람은 진순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왕사 무학이 최초로 태실지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재신과 지관을 보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무학이 직접 내려와 태봉을 살핀 뒤에 태조에게 조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