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장성수열린세상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금산중앙신문

금산의역사문화유적-금산 정인조를 모신 사당 충렬사(忠烈祠)

by JSS열린세상 2018. 7. 11.

금산 정인조를 모신 사당 충렬사(忠烈祠)


추부면 추정리 충렬사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추정리 334번지 에 위치해 있는 충렬사는 정인조 장군의 위폐를 모신 사당이다. 이 사당은 유림원 숙원사업으로 보수를 시도하였으나 재정상 이루지 못하다가?1979년 금산군수가 지원하여 보수하였다 한다.

정인후의 6대손인 정인조(조선 초)는 본관 경주(慶州), 호는 남은, 조선 태종 때 병조판서로 재직중?왜구가 깊숙이 진동현(현재 금산군 진산면 복수면 추부면)까지 들어와 분탕이 심할 때 태조의 명을 받고 왜구를 완전히?소탕하는 대공을 세웠으나 불행히 순국하였다.

충열사 외삼문인 적의문


태조는 월성군에 봉하고 찬성을 증했으며 시호(諡號)를 충열(忠烈)이라 내렸다.금산군 추부면 자부리와 장대리 경계에 있는 철마산 아래 남산마을에 묘가 있는데 풍수상 장군대좌형(將軍對坐形)으로 보기도 한다.


충렬사는 경주정씨 사당으로 신라초기의 6촌 가운데 진지촌장(珍支村長)의 지백호(智伯虎)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고 나라이름을 '신라'라고 하여 건국좌명공신이 되었고, 32년(유리왕 9년) 그의 현손대에 진지부가 본피부라 개칭되면서 낙랑후(樂浪候)에 봉해지면서 정씨(鄭氏)이라는 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516년 (법흥왕 3)에 문화(文和)로 시호를 받았고, 658년(무열왕 3년)에 감문왕(甘文王)에 추봉되었다.


경주정씨의 시조는 지백호의 5세손 정동충(鄭東沖)이 사성(賜姓)된데서 비롯되었다.경주정씨가 정식 문중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중시조인 문정공 정진후(鄭珍厚)때 부터이다.정진후는 검교첨의평리가 벼슬이었던 정극중의 아들인데,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병부상서(兵部尙書) 겸 군기시윤(軍器寺尹)과 평장사(平章事) 등을 역임하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졌다. 그로인해 그 후손들이 경주를 본관으로 하고 있다.그의 묘소는 경북 월성군 내남면 로곡리에 있으며 음력 10월 1일에 향사한다.


현재 경주정씨의 후손들은 문헌공파(文獻公派). 양경공파(良景公派).?월성위공파(月城慰公派).?평장공파(平章公派)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경주정씨는 명문가답게 가문을 대표하는 큰 인물들이 배출되었는데? 조선조에서 15명의 문과급제, 30명의 무과급제자를 냈다.

문헌공파는 중시조인 정진후의 증손인 정위(鄭僞)의 아들 정현영(鄭玄英)을 파조로 한다.정현영은 좌복야를 지낸 정위의 아들로 호부상서와 수문전 태학사를 거쳐 삼중대광 문하시중에 이르렀다.시호가 문헌으로 내려졌기 때문에 문헌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그 후손으로 정헌대부로 이부상서를 지내고 월성군에 봉해진 정종철(鄭宗哲)과 그의 둘째아들로 이성계와 함께 일본군 아지를 격퇴해 이름을 떨친 정인조(鄭仁祚)가 있다.

양경공파는 공민왕 때 모반사건을 토벌하여 도첨의정승이 된 정휘(鄭暉)의 아들 정희계(鄭熙啓)를 파조로 한다.정희계는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창업함으로써 개국 일등공신이 되고 계림군에 봉해졌다.


그의 손자인 정승조(鄭承祖)는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종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감찰(監察)을 거쳐 연산군 때 검열(檢閱)에 재직하였으나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은 사사되고 그는 곽산에 유배되었다.


그후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정진후의 7대손이며 정희계의 6대손인 흑의장군 정발(鄭撥)은 25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 해남현감과 거제현령 등을 거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석달전에 부산진 첨사(僉事)로 부임하여 얼마되지 않아 왜군이 25만 대군과 병선 4만여 척을 이끌고 부산진으로 쳐들어왔다.


그는 진두지휘하며 결사항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전쟁이 끝난 후 조정에서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월성위공파는 파조는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정금실(鄭金實)의 아들로 부마(駙馬)가 되어 월성위에 봉해졌던 정이기(鄭이奇)이다. 정이기의 형인 정보기(鄭寶奇)는 병부상서를 역임했다.정이기의 후손으로 선무원종2등공신에 올랐던 정구(鄭龜)와 그의 아들 정광업과 정홍업이 유명하다.


정광업은 선조 때 제용감(濟用監) 봉사(奉事)를 역임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숙부 정원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참전했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였으며 정홍업은 학문으로 이름을 떨쳤다.

평장공파는? 고려조에 평장사를 역임한 정필(鄭弼)을 파조로 하고 있다 평장공파는 조선 태종 때에 유일로 천거되어 과천. 의성 등지에서 현감을 역임했던 정기(鄭其)와 그의 아들 5형제가 중추적인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 정기는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과?호조 정랑을 지내고, 봉렬대부(奉列大夫)로 한성부 소윤에 추증되었다.


그는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첫째인 정차온(鄭次溫)은 세종 때 언양현감과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상주 판관을 거쳐 권농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둘째 정차량(鄭次良)은 부호군을 지냈고, 세째 정차공(鄭次恭)은 양천군수와 평산 도호부사와 이조참의를 지냈으며네째 정차검(鄭次儉)은 수의교위(修義校尉)로 부사직을 역임했다.다섯째 정차양(鄭次讓)은 해남현감을 지냈다. 후에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자?5형제 모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후진 양성에 힘썼다.


참고자료:인터넷블로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