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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중앙신문

<출향인소식>무농약 재배 고집하는 초보 농사꾼 전영기 씨

by JSS열린세상 2018. 7. 11.

<출향인소식>

무농약 재배 고집하는 초보 농사꾼 전영기 씨
귀농귀촌 지원정책 제도개선해야... 농사짓는데 필요한 인력 확보가 가장 힘들어...


4년전 귀농한 전영기 씨


전영기(61) 이사는 전문 엔지니어로 한국가스기술공사에서 간부로 재직하다가 정년퇴직한 뒤 2014년 집을 지어 금산으로 내려왔다.


금산으로 내려오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오래전에 아버님께서 공직에 있을 때 제원면에 2000여 평의 토지를 미리 구입해 놓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시골로 내려와 아버님께서 큰 아들 몫으로 남겨주신 1000여 평에 아로니아를 심었다.


전영기 씨의 아로니아농장


아로니아 재배를 선택하게 된 것은 다른 작물에 비해 손이 덜 가고 수확량이 좋고 효능면에서도 월등한 것이 맘에 들었다. 하지만 도시에서 오랫동안 직장생활만 했던 초보 농사꾼에게는 농사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농약을 전혀 치지 않는 친환경 농법을 선택한 그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뽑고 뒤돌아서면 나면 금세 무성하게 자라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잡초를 일일이 손으로 제거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인근 마을 어르신들께 부탁해 김을 매 보지만 끝이 없다. 인건비도 한 사람당 7만 원으로 농사 수입에 비해 부담이 되었다.
 

초보농사꾼 전영기 씨의 아로니아 농장


처음에는 혼자서 천여평의 아로니아 밭을 밭을 매고 관리했다. 그러나 혼자서는 무리였다. 농사는 해도 해도 일이 끝이 없었다. 농사에 대해 모르는 정보는 주로 인터넷을 활용했다. 그야말로 주경야독이었다. 농사짓는 분들이 기술에 대한 고급 정보는 잘 안 가르쳐주기 때문에 나머지는 스스로 경험을 통해서 터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귀농한 뒤 아로니아 농장 한켠에 목조주택을 지었다.


지난해에는 아로니아를 수확해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나머지는 도매로 건강식품 가공공장에 모두 넘겼다. 전영기 씨는 지금까지 무농약 농법으로 아로니아 재배를 고집하고 있다. 하지만 주변 농가에서는 불만이 많다. 혼자서만 농약을 안치면 벌레들이 많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농약을 쳐서 농사지을 생각은 없다. 건강한 먹거리를 위해 무농약 재배는 고수할 생각이다. 전영기 씨 농장에서 생산되는 아로니아 열매는 넓은 뜰에 위치하고 물 빠짐과 통기성이 좋고 일조량이 풍부해 당도가 약 15 브릭스 이상으로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다.


전영기 씨의 집앞에는 강과 산이 있어 풍광이 수려하다


올해는 지난해에 비해 비교적 작황이 좋아 수확량이 약 4톤가량 예상된다. 판매에도 큰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본다. 무농약 재배가 알음알음 소문이 퍼지면서 구입을 희망하는 단골도 100여 명으로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전영기 씨는 슬하에 아들 형제를 두었다. 큰 아들은 아주대 건축학과를 나와 결혼해서 건축설계사 일을 하고 있다. 작은 아들은 경찰행정학과를 졸업해 경찰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도시에서 교육사업을 하는 아내는 이번에 함께 내려오지 못했다. 작은 아들이 취준생으로 아직은 까지는 부모의 그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은 아들이 취업하면 곧바로 합류할 예정이라고 한다.
 
전영기 씨의 부친은 경찰공무원으로 자녀교육에 있어서 매우 엄격한 분이셨다. 아버지께서 퇴근할 때 멀리서 기척이 들리면 형제들은 항상 긴장해야 했다. 하지만 엄격함 뒤에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다.


부친께서는 제1회 금산인삼축제 때 제관으로 기원제를 지내시기도 하셨다. 2남 5녀 중 아들로 첫째인 그는 금산읍 오리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금산 중고등학교 졸업 후 상경해 인하공전에서 학업을 마치고 한국가스기술공사에 입사해 30여 년간 가스 관련 엔지니어로 한길을 걸어왔다.


화학 공부에 대해 유독 관심이 많았던 전영기 이사는 금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서울에서 공부를 하고 싶어 아버님께 서울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졸랐다고 한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으로는 전학을 못 가니까 고등학교 2학년으로 편입하겠다고 하자 아버님께서는 공부는 목표를 정하고 자신이 하기에 달렸다면서 학교 탓하지 말라고 나무라셨다고 한다.


혈서까지 써보이며 아버지를 설득했지만 경제적인 사정으로 결국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며 그때를 아쉬워했다.


그에게는 어릴 적부터 하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강한 뚝심이 있었다. 아버님께서 경찰공무원으로서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성장기를 보냈던 것도 강직한 성격 형성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금산에서 전형사하면 아직도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다고 귀띔한다. 그의 아버님은 전북 봉동에서 태어나 삼례고등학교까지 30리 길을 걸어서 다녔다고 한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인하공전을 다니면서 1981년도 가스 1급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가스와 인연을 맺는다. 또한 대학교 시절 수석으로 장학금을 받으면서 다닐 만큼 명석했다. 지금은 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인하공대로 편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그가 졸업할 당시에는 그런 제도가 없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친구의 권유로 서울에 있는 호텔 등에 주방기구를 납품하는 제작설비회사에 취직을 했다. 미리 따놓은 가스 1급 자격증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가스 1급 자격증 소지자는 전국에 7명밖에 안될 정도로 매우 귀했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아 퇴사 후 한국전력보수주식회사에 입사해 발전소 파견근무를 하면서 가스설비 관련 일을 시작했다. 그는 좀 더 전문적인 기술을 배우기 위해 위해 독학으로 일본어를 마쳤다.


노력한 만큼 직장에서도 특정 기술분야에서 만큼은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을 받았다. 또한 부친의 영향을 받아 비록 업무에 있어서 불이익을 당할 줄 알면서도 결코 불의와는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혹과 당장의 이익을 취하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것이 지금까지 큰 사고 없이 무사히 직장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직을 할 수 있었던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한다.


전영기 씨는 비록 귀농을 했지만 수십 년 동안 해온 가스 관련 일을 아직은 끈을 놓지 않았다. 대전에서 퇴직자 모임 주선하고 있으며 노동부 재해예방 전문지도기관에서 안전지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건축현장 등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재해를 사전에 예방하는 전문적인 업무다. 이를 통해 가스안전교육 등 재능기부도 생각하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전문 엔지니어였던 초보 농사꾼 전영기 씨, 이제 그가 농사를 짓겠다고 귀농을 선택했다. 지금까지 그가 성실하게 살아온 만큼 인생 2막을 통해 자연 속에서 순응하며 충분한 보상을 받을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전영기 씨는 인터뷰에서 귀농귀촌 지원정책에 대한 문제점도 지적했다.귀농귀촌 시 지자체 정책 기준에 맞춰 소정의 교육을 받고 정착지원금을 신청할 때 금융기관에서 담보물을 제공을 요구하는데 이 부분은 귀농 귀촌하시는 분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면서 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는 이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함께 제도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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