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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중앙신문

금산읍 아인리 석탑과 사직단

by JSS열린세상 2021. 1. 19.

전 병 열 논설주간

아인리석탑(금산동중학교 뒤편)

금산군에서는 아인리에 있다는 이유로 아인리석탑이라고 기록해놓았다. 그렇다면 탑선리에 있는 탑 역시 중도리탑이라고해야 맞지않을까 싶다.

 

용머리 마을 뒤에 있다고해서 용머리탑이라고 전해져 내려오는 것을 아인리탑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용머리 마을위 전 농업고등학교 현재 산업고 입구 좌측에 큰물이 솟아올라 연못이 형성되고 그 물이 마을앞으로 흘러내려 농사를짓고 살아온 곳으로 마을의 역사는 깊지않다고본다.

 

아인리 석탑 이정표

용머리라고 마을 이름을 부르게된것은 산세나 지형으로보아 풍수지리 학설에 의한 龍頭가 아니라 마을 윗머리에서 큰물이 솟아 오른다는 뜻으로 물솟을 용자를 써서 涌머리마을이라고 부른것으로 생각한다.

 

용머리탑에 대한 안내문을 보면 탑의 형태에 대한 설명과 金貴大德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된것으로보아 고려시대에 탑이 세워진것으로 여겨진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아인리석탑 소개문

여기서 명문 글귀를 해석을 해보면 금귀는 매우귀하다라는 뜻이며 대덕은 큰덕이라는 뜻과 또 다른 해석이있다. 고려시대 승려시험에 합격을하면 대덕이라는 법계 계급을 내렸다고한다. 여기서 금귀라는 앞글자와 대덕이라는 뒤글자를 대비하면 승려의 법계라고 보기는 어렵다.

 

금귀대덕 네글자를 한 문장으로 해석하면 귀히 존경을 받을려면 크게 덕을 베풀어야 한다라는 뜻으로 아마도 원님이 백성의 안녕을 소원하는 제사를 올렸을것으로 여겨지며 대덕자가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려시대의 유물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2. 금산의 사직단

조선후기의 지도에 나타나는 금산의 사직단의 위치는 현 산업고 뒷산 동중학교 서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한자로는 토지'신'사자에 곡신'직'자와 단'단'자로서 社稷壇 이라고 쓴다.

 

사직단에는 토지를 관장하는 社神과 오곡을 주관하는 稷神을 모시는 단을 쌓고 神室을 모셨다. 풍요를 기원하는 祭를 올리는 곳으로 東軒 서쪽에 안치되어있는 것이 원칙이다.

 

조선시대 궁궐의 사직단 또한 서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사각 평면으로 한 면의 길이는 25척에 높이는3척의 평면으로 되어있고 社壇은 동쪽에 稷壇은 서쪽에 5척의 간격을 두고 둘로 나누어 제단을 쌓았으나 지방관청에서는 사신과 직신을 하나의 단으로 만든 곳도 있다. 둘레에는 기와 담장을 쌓고 동서남북에 홍살문을 세웠으며 남쪽으로 출입하는 정문을 두었다.

 

사직단의 설치는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도 세워졌으며 음력2월 仲春節과 음력8월추석 仲秋節, 산짐승을 잡아 신에게 제를 올린다는 臘日납일 동지 사흘지나 未日에는 대향사를 정월에는 기곡제를 가믐때는기우제를 올렸다.

 

전국의 사직단들이 왜정시대 훼손하여 공원이나 학교부지로 사용하여 사라진것을 부산, 대구, 산청, 창녕,남원, 보은의 사직단은 복원하여 관리를하고 있는데 금산군에서는사직단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유서깊은 역사의 흔적을 찾아 금산고을원님의 백성 사랑하는 정신을 후손에게 길이 전할수 있도록 복원 되어야 한다는것이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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