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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중앙신문

금산읍내 마을 이야기

by JSS열린세상 2021. 1. 21.

전병열 논설주간

 

금산읍

조선시대 금산 읍내의 지형을 살펴보면 진악산 와정리에서 출발한 산 줄기가 천주교회 아래 새금산병원까지 작은 능선을 이루며 줄기차게 뻗어 내렸다. 남쪽으로는 금산천이 감 싸돌아 흐르고 산 뒤편 북쪽으로는 뒤 긴 내라는 작은 냇물이 흘러 신틀바위에서 합류하여 봉황천으로 들어선다.

 

뒤 긴 내와 금산천 사이를 읍내라 하였으며 읍내에는 열세 개의 관청과 중1리와 중2리 섬마을 島村이라는 세 개의 마을이 있었다. 지금의 아인리와 상리 지역에 관청이 모두 있었고 신협 앞 도로 건너편에 鄕廳이 자리를 잡았다.

 

천주교회 아래에는 중1리 중2리라는 마을이 있었으며 금산천 냇물이 수천 년 휘돌아 흐르면서 빚어낸 섬마을 島村이 자리하고 있던 장소는 비석거리에서 큰 다리, 중앙극장 아래 골목길을 따라 새누리관을 한 바퀴 돌아 이어진 도로가 섬마을이다.

 

그 아래 구 인삼전 자리에는 시장이 들어섰다.

 

큰 다리 건너 郡二面에는 좌측 골목길에 옥거리(玊巨里)가 있었는데 옥구슬 공방이 있었던 곳이다. 광신 제재소 부근에는 죄수들의 獄舍가 있고 중앙초등학교 남 서쪽에는 관청의 손님을 위한 錦溪官이라는 객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 후기 이후 군이면에 가옥이 들어서면서 옥거리의 옥자를 붙여 물 아랫마을을 하옥리라 하고 금산천 웃말을 상옥리라 하였다. 읍내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마을 중리의 中자와 도촌의 島자를 따서 지은 마을 이름이 중도리다.

 

상리는 동헌이 있던 곳이라 해서 윗자리라는 뜻의 높임말 上자를 써서 이름 지어 부르게 되었고 아인리 마을은 높은 지위를 가진 자들의 관사가 있어서 지어진 마을 이름이다.

 

동헌 북쪽에는 향교가 자리를 잡고 동쪽으로는 문둥병 악귀에게 제를 올리는 라단과 서쪽으로는 토지신과 곡신에게 제를 지내는 사직단이 있었는가 하면 약초시장 자리 작은 연못 가운데 翠香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풍류를 즐기던 양반계급들의 술잔 돌리는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기생들의 노랫가락에 어울리는 장구 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훗날 많은 사람들이 금산으로 이주하면서 中島里, 衙仁里, 上里, 上玉里, 下玉里 마을을 중심으로 또 다른 마을들이 주변에 조성되어 함께 어우러져 사는 고장으로 활기차게 발전되어 이어져 왔으나 역사성이 없는 신 주소지 변경으로 옛 마을의 명칭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안타깝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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