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충공 한교(韓皦),유곡 이유택(李惟澤) 두분의 효자 현인을 모신 유곡서원(柳谷書院)
유곡서원 금성면 하류리
금산군 금성명 하류리 유곡에 있는 사당으로 유곡사에는 문충공 한교(韓皦)와 유곡 이유택(李惟澤) 두분을 모신 사당이다.현종15(1647년)에 건립되었으며 숙종28년(1702년)에 유곡사라는 사액을 내리고 복호2결을 내려 자손만대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1871(고종8년)에 사원철폐로 훼철되었다가 후손과 지역유림이 1964년에 복원하여 해마다 지방유림에서 음력 3월21일에 제향을 지낸다.
유곡서원 금성면 하류리
배향인물 중 한분인 한교(韓皦)(1157~1221)선생은 자는 명보(明甫) 호는 회묵재(晦黙齋)이며 본관은 금계로 금계한씨의 시조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고려시대 명종, 신종, 희종 때 3조에 걸쳐 벼슬하여 좌리공신으로 금계군에 봉해졌으며 효자로서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19세 때 어머님 병환이 날로 위중하므로 한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구환(救患)했으나 효험이 없자 혈지관구(血脂灌口)하여 소생시켜 수개월동안 연명하게 했다.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여막을 짓고 죽을 먹고 곡읍(哭泣)하며 3년상을 마치니 인리십실(隣里十室)이 공의 지극한 효성에 감화되어 모두 효자가 되었으므로 그 동에 이름을 효자리라 부르게 되었다.
또 이곳에 배향하고 이는 이유택(李惟澤)으로 선조 33년 庚子(1600) - 현종 9년 戊申 (1668) 동안 생존했으며 호(號)는 유곡(柳谷)이고 관직(官職)은 대흥현감을 지냈다.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하류2리 (정문동)에 묘소가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 6일 에 세일사를 지낸다.
그가 69세 노인이 된 뒤에 어머니가 병들어 세상을 떠나셨는데, 상을 치르는 동안 물도 제대로 넘기지 못해 몸이 다 상하였다.
혹시라도 밥상에 맛있는 반찬이 올라오면 집안 사람들을 꾸짖어 물리쳤다. 어머니가 무덤 속에 계시는데 자기 혼자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석 달 동안 무덤을 지키며 상복을 벗지 않았다. 삼년상을 치르다가 상복도 갈아입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마쳤다. 숙종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1674년에 정려를 세우게 하였으며, 복호(復戶) 2결과 함께 논밭을 내렸다. 문충공 한교와 같이 모시게 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그의 효성을 기려서 1694년에 사우를 세우고 대대로 제사지냈다.
아우 이유태도 금성면 하류리에 서당을 차리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글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효도하는 생활을 몸으로 보이며 가르쳤다. 이곳에 세워진 서원을 그의 호를 따서 초려서원이라고도 하며, 형인 이유택의 호를 따서 유곡서원이라고도 한다.
이유택의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에 그의 집에 어미닭 한 마리가 있었는데, 병들어 곡식도 쪼아 먹지 못했다. 그러자 지난해에 낳았던 병아리 한 마리가 어미닭을 따라 다니면서 부리로 곡식을 물어다 먹여 주었다.
그렇게 몇 달을 먹이다가 어미닭이 죽자 병아리가 슬퍼 날뛰면서 울부짖었다. 며칠 동안 슬퍼하다가 결국 병아리도 죽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면서 "효자의 효성에 병아리들도 감화되었다." 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금산중앙신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농귀촌>딸기재배지로서의 모퉁이가 아닌 근간이 될 수 있다-금성면 여민 딸기농장-최성민 씨 (0) | 2018.03.19 |
---|---|
<이장님 이장님 우리 이장님> 허정애 이장 금산읍 중도8리 (0) | 2018.03.19 |
선유도 기행-수필가, 전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0) | 2018.03.16 |
<세상은 넓고 할 일도 많다>-창업! 돈이 아닌 인생을 계획하기-송은석 (사)한국로봇교육연합회 부회장 (0) | 2018.03.16 |
<고사성어>견리망의(見利忘義)-석보선 보광사주지스님 (0) | 2018.03.1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