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도 기행
(수필가, 전 부여군 부군수 나창호)
아랫녘 섬진강변의 매화마을에 꽃이 피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농촌에 사는 고등학교 때 친구가 집 뜰의 설중매가 두세 송이 꽃망울을 터트렸다고 카톡 사진을 보내왔다. 매화향이 코끝에 스미는 듯 했다. 꽃샘추위 끝에 게으름 피던 몸을 일으키고 싶던 차에 집사람이 선유도에 가자고 한다. 백수로 사는 세 집이 돌아오는 금요일에 봉고차 한 대를 빌려서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한 집은 나처럼 남편이 공직생활을 하다 퇴직해서 놀고 있는 오숙씨네고, 또 한 집은 남편 회사의 공사 관계로 2년여 동안을 제주도에서 생활하다가 지금은 일을 마치고 돌아와 잠시 쉬고 있는 종순씨네라고 한다. 여자들끼리 작당하여 가자는데 몸만 따라가면 되니 그러자고 했다.
선유도 가는 날 운전대는 늘 하던 대로 집사람이 잡았다. 군산에서 고군산군도 무녀도로 향하는 새만금 방조제 일직선 도로가 시원스럽다. 하늘도 티 없이 맑다. 주말이나 휴일이 아닌 때에 이렇게 한가롭게 놀러 나올 수 있는 것은 백수들만의 특권이다. 직장가진 사람들이야 평일에 놀러 나오는 걸 언감생심 꿈이라도 꿀 일인가.
좌우로 보이는 바다가 한없이 넓다. 언뜻 보면 어느 쪽이 바다고, 어느 쪽이 내륙 간척지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잔잔한 바다 위로 따뜻한 햇살을 받은 물비늘만 수없이 반짝이고 있다.
잠시 후 차가 고군산대교를 건너 무녀도에 닿았다. 하지만 자동차는 이제 버려야 했다. 무녀도-선유도-장자도로 이어지는 도로공사 중이라서 차량이 더는 진입할 수가 없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서 선유도에 갈 수 있는 방법은 3가지였다. 마을 사람들만 운행한다는 차량을 타고 가거나, 임대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걸어서 가는 방법이다. 동네 차량을 운행하는 사람들은 과장이 좀 심했다. 걸어서 선유도 까지 1시간 20분쯤 걸리니 차로 가는 게 편하다면서, 왕복 1인당 1만원, 선유도 관광을 포함하면 모두 8만원을 달라고 했다. 자전거는 1대당 1시간에 5천원이고.
내 짐작으로 조금 멀게는 보이지만, 선유도 까지 대략 40분 정도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장자인 내가 등산한다 생각하며 걷자고 했다. 차를 타고 훅훅 지나가느니 운동 삼아 천천히 걸으면서 섬 구경을 하자고 했다. 여자들이 먼저 좋다고 하고, 남자들도 찬성해서 모두가 걷기로 했다.
바로 왼편으로 보이는 코앞의 두 개 쥐똥 섬은 바닷물이 들어와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해변에는 갈매기들이 먹이를 찾고, 바다는 거울처럼 잔잔했다. 서두를 것 없이 발길 떨어지는 대로 걷는 재미가 쏠쏠했다. 따뜻한 햇살이 비치고 부드러운 봄바람이 어루만지고 간 자리에는 새싹들이 돋고 있었다. 도로 둑에는 구경은 뒤로 한 채 쑥을 뜯는 아주머니들도 있었다.
이야기하며 걷다보니 어느덧 제법 큰 마을과 무녀도초등학교가 나왔다. 아담한 섬 학교는 조용하기만 하다. 인사이동이 있었는지 ‘누구누구 선생님 그동안 수고하셨다느니, 누구누구 선생님 환영한다.’느니 하는 현수막이 학교 외벽에 걸려 있다. 섬 학교에 근무하다 떠나는 마음이 후련할지 서운할지가 문득 궁금했지만, 물어볼 사람은 없었다.
마을을 지나 왼쪽으로 돌아서자 바로 코앞에 빨간색 선유대교가 보인다. 선유대교는 완공이 됐지만 아직 통행은 허용되지 않고 있었다. 무녀도 쪽이나 선유도 쪽이나 교량 양편에서 도로공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전거와 사람만 다닐 수 있는 좁은 구 교량을 통해 선유도에 들어섰다. 경치가 하도 좋아 신선들이 놀았다는 선유도다. 한국관광공사가 지정한 ‘한국인이 꼭 보아야할 국내 관광지 중 1곳’이기도 하다.
우리가 무녀도를 출발해서 선유도에 발을 딛기까지 50여 분쯤 걸린 것 같았다. 내친김에 선유도를 걸어서 일주하기로 했다. 선유대교 조금 지나서 왼쪽 해안가 길로 들어섰다. 해안을 따라 트레킹 길(데크)이 잘 나 있다. 섬 가장자리를 따라 걷는 재미도 좋고, 발아래서 철썩이는 바다와, 건너편의 섬마을 경치와 넓은 바다, 맑은 공기가 좋았다.
데크 길을 걷다보니 사람들이 쉬어가라고 그랬는지 작은 광장처럼 널찍한 곳이 군데군데 나왔다. 마침 점심때가 지난지라 한 곳에 자리를 잡고 게으른 점심을 먹었다. 포도주로 재서 삶았다는 연한 돼지고기 수육과 두부와 볶은 김치와 그냥 김치와 잡곡 찰밥과, 사과와 오렌지 등등. 각자 가져 온 짐을 풀어 맛있게 먹었다. 특히 종순씨네 수육 상추쌈으로 소주 한잔하는 재미는 더 없이 좋았다. 바닷바람 쐬며 먹으니 술도 취하지 않아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먹은 것 같다. 휴식을 겸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1시간 남짓 시간을 보내다 다시 걸으니 머잖아 아담한 옥돌해수욕장이 나왔다. 신기하게 해변의 돌들이 모두 납작하고 반질반질하다. 얼마나 오랫동안 바닷물에 씻겼으면 모진 곳 다 덜어내고 이리 반질거릴까?
주변에는 식당과 몇 채 안 되는 집들만 있고 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 마침 해변에 나와 있던 주민에게 명사십리 해수욕장 가는 길을 물으니 산을 넘어 가라며 길을 알려 준다. 그런데 산이 아니라 낮은 언덕길이었다. 섬사람들은 언덕조차도 산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나무들 사이로 난 외줄기 길을 따라 걷다 보니 길가 찔레나무는 벌써 파란 잎을 틔우고 있고, 껍질 검은 해송의 바늘잎도 반들반들한 윤기를 띄우고 있다. 곧바로 언덕 끝이 나왔다. 왼쪽으로 선유봉이 보이고 선유봉 밑은 장자도로 연결될 도로의 터널이 뚫려 있다. 또 한 갈래로 공사 중인 비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니 기존 도로와 연결됐다. 왼편을 돌아보니 장자도로 들어가는 빨간색 다리가 보이고, 가까이도 멀리도 아닌 어중간한 거리에 장자도가 있다. 시간 상 장자도는 나중을 위해 남겨 두자는 핑계를 댔지만, 섬이 고요하고 아늑한 것 같아 가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미련을 버리고 우회전해 걸으니 곧 선유스카이선과 명사십리 선유해수욕장이 나왔다. 선유스카이라인은 35미터 높이에서 줄을 타고 건너편 섬까지 빠르게 바다를 가로지르는 체험시설이다. 선유해수욕장 모래는 아주 희고 고왔지만 아직 사람들은 없었다. 해수욕장 건너편으로 보이는 바위산 망주봉이 아름답다.
우리는 해수욕장을 따라 걷다가 바다를 가로지르는 긴 데크 다리를 건너 스카이라인 도착지인 작은 섬까지 가 보았다. 문득 다리 상판을 투명한 안전유리판으로 깔았으면 바닷물을 내려다보며 걷는 재미가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섬에 도착해 마침 스카이선을 타고 내려온 젊은 여자를 보고, 무섭지 않냐고 물으니, 괜찮다. 재밌다고 한다.
건너다보이는 장자도와 먼 바다 쪽 섬 구경을 한동안 하다가 작은 섬을 도로 나왔다. 설탕가루 같은 백사장에 앉아 지고 다니던 막걸리 병을 꺼내 한잔씩 하려니 아직은 바닷바람이 차다. 해수욕장을 되짚어 나와 왼편으로 꺾어드니 곧 선유도 여객선 터미널이 나왔다. 비 오는 날 자식을 배에 태워 뭍으로 보내던 어머니들이 마음 졸이며 애를 태우던 곳이기도 하고, 뭍에서 오는 자식을 반갑게 맞던 곳이기도 할 것이다.
저 멀리로 고군산대교 외주탑이 바람을 잔뜩 받아 부풀은 돛처럼 다시 보였다. 마치 D자 같다. 많은 섬들도 보였다. 고군산군도는 유인도 열여섯 개에 무인도 까지 모두 예순세 개나 된다더니 눈길마다 섬이다. 크고 작은 섬들이 바다 위에 오밀조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선유도 선착장에 유람선이 들어오는지 경쾌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눈에 들어오는 선유대교가 더 반가웠다. 이제 조금씩 지친 기색들이지만, 선유도를 무사히 일주하고 돌아간다는 뿌듯함이 이심전심으로 전해졌다.
선유도를 벗어나 ‘장구와 술잔을 앞에 놓고, 무당이 춤을 추는 형상’이라는 무녀도에 다시 들어섰다. 한번 갔던 길을 되짚어 오기란 쉽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무녀도 쥐똥 섬이 있는 마을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멍게와 해삼과 산 낙지회를 먹으며 소주에 취했다. 섬도 바다도 끼륵끼륵 울며 나는 갈매기도 정겹다. 다소 무리한 여정이었지만, 일행 모두가 아무 탈 없이 쌩쌩했다. 오존 섞인 섬 공기 덕분이 아닌가 싶다. 남자들이 얼큰하게 취한 후에야 귀로에 올랐다. 오후 4시가 지나서였다. 두 발만을 의지해 무녀도에서 선유도 일주를 하고 다시 무녀도로 돌아온 시간은 5시간쯤 되는 것 같다. 그런데도 피로감은 없었다. 섬 비경에 취하고 술에 취하고 맑은 공기에 취해서가 아닐까. 어쨌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 즐거운 봄날 하루였다. (2017,제12회 대전문학 수필부문 신인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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