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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중앙신문

<금산의 역사문화유적>금산 천내리 용호석(川內里 龍虎石)

by JSS열린세상 2018. 6. 27.

<금산의 역사문화유적>

금산 천내리 용호석(川內里 龍虎石)


용호석이 있는 천내들녁


천내리 용호석은 유형문화재 제4호(충청남도 금산군 제원면 천내리 1006)로 용과 호랑이 모습을 2기(基)의 돌에 새긴 것으로 천내리의 서쪽을 흐르는 천내강변 제원대교(濟原大橋)에서 북쪽 100m 지점에 용석(龍石)이, 그로부터?다시 북쪽으로 500m지점에 호석(虎石)이 위치하고 있다.천내리를 기준으로 마을 앞 왼쪽에 용석, 오른쪽에 호석이 위치하여 좌청룡. 우백호의 좌향을 따르고 있다.


용석


용석은?소용돌이 모양으로 된 여러개의 돌기와 그 사이에 꿈틀거리는 용의 몸체가 조각되어 있고,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는 입 양편에는 아가미와 수염이 표현되어 있다.승천하는 용의 모습이 역동적으로 묘사된 모습이다.크기는 용석이 높이 138m, 폭 81cm이며, 호석은 높이 140m이다.


호석


호석은 호랑이가 앞발을 세우고 앉아 있는 모습인데 두툼하게 튀어나온?곡선과 동그라미를 조각하여 호랑이의 털 무늬를 만들었다.왼쪽발에 꼬리가 감긴 채 잔뜩 힘이 들어간 것은 수호신으로서 긴장을 늦추지 않는 모습이다.호석의 몸체는 서쪽을 향하였으나 머리는 북쪽을 향하였으며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오랜 신민지배에서 벗어나 지주적인 국권회복을 꾀하였으나 두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과 내부 반란으로 개경이 함락하는 등 커다란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공민왕은 개경을 버리고 경기도 이천을 거쳐 충북 음성, 충주, 죽령을 넘어 복주(안동)로 떠났다.


이듬해 공민왕의 환도 행렬은 "상주를 떠나 보은 원암을 지나서 옥주(옥천)에 한동안 머물다가 다시 회인을 거쳐 청주로 갔다"고 『고려사』에는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 공민왕이 옥천에서 머무른 곳은 영국사로 전하고 있다. 용호석은 공민왕 ?자신의 능묘(陵墓)의 위치를 정하고 필요한 석물(石物)로 준비하게 하였으나?개경(開京)으로?돌아간 후 그대로 두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용호석과 함께 천내강을 품고 있는 제원면은 금산군의 동쪽에 위치한 면으로 동쪽의 천태산, 월앙봉을 경계로충청북도 영동군, 남쪽의 소사봉과 금강을 경계로 부리면과 접한다.제원면을 통과하는 봉황천과 금강 유역에는 평지가 발달되어 있다.제원이란 명칭은 현 제원초등학교 자리에 들어섰던 제원역(濟原驛)이?있었던 것으로 유래된다. 제원역은 무주. 용담. 진안. 고산. 등 주변 지역에 있던 역을 관장하는 찰방역이었다 한다.


또 예전에 이곳에는 금산군과 영동군을 잇는 천내나루터가 있었다. 제원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금산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나루터 중 그 규모가 가장 큰 규모였다.역사적으로 조상들의 얼과 숨결이 살아 숨쉬며 삶의 애환이 담겨있는 교통의 중심지요 군사의 요충지로서 충청도와 경상도를 이어주는 길목으로 조선시대에는 제원역이 설치되고 5일장이 활성화되면서 나루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으며 일제 강점기인 1932년에는 충북 영동군과 금산군을 이어주는 영금선의 개통으로 천내나루는 절정을 이루었다.금산 장날이면 많은 외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농번기가 되면 곡식 등을 운반하는 운송로였다.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 때 금산군수 권종이 왜군이 영동을 거쳐 호남곡창지대를 점령하기 위해 금산으로 진격해오자 제원찰방 이극경과 합세하여 이곳 갯터에 관군과 의병을 모아 진을 치고 천내강을 건너오는 일본군을 맞아 싸웠으나 격전끝에 아들 권준과 함께 전사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자동차를 운반하는 배가 있었고 관에서 지원하여 철로 나룻배를 건조하기도 하였다.


당시 영금선을 이용하는 차량이 몇대 안되었고 해방 뒤에는 하루에 1~2차례 버스가 운영되었으며 나루를 이용하던 천내 나룻배 목선은 천내리 주민들의 배걸림굿을 통해 건조되었다.나룻배를 이용할 때 2~10전을 받았으며 관내주민은 무료로 이용하였다.


한편 목수가 배를 만들고 건조가 마무리 되면 주민들이 한데 모여 진수식과 뱃놀이를 즐겼는데 일제의 민속문화 억제 정책으로 1945년 전후로 사라졌던 천내배묻이굿놀이가?60여년만인 2005년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었다. 복원된 천내배묻이굿놀이는 나룻배를 복원해 배묻이 선통마당. 걸립마당. 배묻이 마당. 신수고사굿 및 뱃놀이 마당 등 4개 마당으로 나눠 매년 금산인삼 축제 개회식 때 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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