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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중앙신문

천안 전씨 대제학공파 금산군 시조 대호장군 전충노

by JSS열린세상 2018. 7. 4.

천안 전씨 대제학공파 금산군 시조 대호장군 전충노


군북면 가마실 천안전씨 제각


대제학의 아들 영좌[永佐]는 조선조 종2품 전라도 관찰사, 영좌[永佐]의 아들 의[]는 조선조 사택원 판관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집필하였으며, []의 아들 순생[順生]은 세종조 전라도 담양 도호부사를 지내다가 1455년 단종 2년에 졸 하였다. 충남도 금산군의 시조 충노[忠老]는 순생[順生]의 장자로서 배후 순창 설씨[薛氏]와의 사이에 원손[元孫], 형손[亨孫], 리손[利孫], 치손[致孫], 확손[確孫] 다섯 아들을 두었으며, 금산에서 세거하는 천안 전씨[天安 全氏]는 셋째 아들인 리손[利孫]의 자손이다.

 

전충노[全忠老]는 어려서부터 무예에 출중하여 말 타기를 즐기고 활을 잘 쏘아 날아가는 새를 떨어트리고 산짐승을 잡았다. 세종 조 4년 무과에 급제하여 대호군이라는 장군의 반열에 올라 함길도 절제사 김종서 장군 휘하에 있다가 세종의 명을 받은 김종서 장군과 함께 10여년에 걸쳐 여진족을 몰아내고 두만강 일대의 종성, 온성, 회령, 경원, 경흥, 부령의 육진을 개척하였다.

 

그러나 세종과 문종이 죽고 문종의 세자 단종이 12세에 즉위하자 1453년 숙부인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으로 좌의정이었던 김종서를 살해하고 어린 단종을 1457628일 강원도 영월군 청령포에 유배를 시킨 뒤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사건이 터지자 4개월 후인 1024일 단종이 살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대호군 충노는 한 밤중 처자를 데리고 성문[城門]을 몰래 빠져나와 밤으로 산길을 걸어 걸식을 하며 귀향길에 올랐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몇 날 몇 밤 별빛을 등불삼아 걸어왔을 조상님의 고난의 길을 생각하면 뼈마디가 저리도록 아프고 눈물이 강물처럼 흐른다. 가시넝쿨 같은 삶을 살아 온 조상이 계시어 오늘날 우리가 이 땅위에 태어나 살고 있으니 그 은덕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하겠다.


한성을 탈출하여 수원, 오산, 천안, 회덕을 지나 한밭[대전]에 당도하여 머들령에 올라서 바라보니 큰 산[서대산] 준령이 뻗어 내린 것을 보고 처자를 더 이상 고생 시킬 수 없다는 마음에 금주읍성으로[금산읍] 가려든 발길을 돌려 서대산 준령을 너머 국사봉아래 심심유곡 깊은 산중으로 들어섰다. 움집을 짓고 산전을 일구며 초근목피로 짐승처럼 생명줄을 이어 갔으리라 생각하니 천지가 개벽토록 서럽고 슬프도다.

 

한 집 두 집 화전민들이 들어서기 시작하고 벙어리 행세를 하며 산전의 곡식을 거두어들이던 어느 가을날, 풀어헤친 머리털에 기골[奇骨]이 장대하며 풍채가 있고 눈에 광채가 있는 것을 보고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여긴 지나가던 노승이 여보시오 당신누구요?” 하고 여러 번 물어도 대답이 없자 밭으로 올라가 작은 소리로 정말 당신누구요?” 하자 전가[全家]라고 대답을 하고는 더 이상 말이 없자 스님은 홀연히 두물머리 신안사 재 너머로 사라져 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후대 사람들이 전씨가 살았다하여 지어진 산골 마을 이름을 자전뱅이라 하였다.

 

셋째 아들인 리손[利孫]이 남일면 초현 무송 윤씨[고려 말 무송에서 3세조 윤수평이 금산으로 이주] 집안으로 장가를 든 후 자전뱅이 산중을 벗어나 두두리를 거쳐 하늘이 마을을 지나 이리리 재를 너머 *가마실[伽麽室]에 안착을 하게 되어 천안 전씨[天安 全氏]세거지가 되었다.


리손[利孫]의 사후[死後] 150여년이 지나 우암 송시열선생이 비문을 지은 것으로 보아 남일면 음대리 산천재 윤선거 서원을 오가던 중 리[], [], 조부의 높은 경지에 오른 학식과 덕행 그리고 충무위부사[忠武衛副司]직을 지낸 것을 알고는 묘비명 하나 없이 외로이 누워있는 봉분을 보고 충무위부사직전공리손지묘[忠武衛副司直全公利孫之墓]라는 묘갈명[墓碣銘]을 지어 전하니, 후손들이 이때에 이르러 비석을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산천재 윤선거의 서원으로 김집, 권시, 윤휴, 시남유계, 초려이유태(금산버드실출신), 우암송시열 등이 만나 시를 읊고 학문을 논하였다. 당시 우암 송시열은 회덕에서 대전, 만인산 준령 머들령을 넘어 추부 대암리, 새말, 금산읍을 거쳐 남일면 음대리에 소재한 산천재 윤선거의 서원을 왕래 하였다.”

      

그 이후로는 후손들에게 학문을 가르치지 못해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리손[利孫]의 형제들이 흩어져 500여년이 흐르도록 금산 천안 전씨 시조 충[], []자 묘지를 잃어버리게 되어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찾던 중, 1980년 당시 종친회장 전해량이 군북면 자전방이[自全坊坨] 산골 마을에 옛 부터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전장군 고총[全將軍 古塚]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어 찾게 되었다.

 

종회를 열어 사유를 밝히고 금성면 대암리 산 35-1번지 충노의 삼자[三子]인 리손[利孫]의 묘소[족보기록-이서 조대산성 하 자좌. 二西 鳥臺山城 下 子座] 부근으로 이장 할 것을 결의하여 1984년 갑자 103일 현 위치로 안장 하였으니 가슴에 새기어 중히 여길 것이며 자손만대 길이길이 배향[配享]하기를 소원 할 뿐이다. 20세에 무과에 급제 하고, 33세에 은거하여 을미 6853세에 세상과 이별 하였으니 하늘이 놀라 때 아닌 날벼락이 치고 국사봉이 슬피 울었도다. 조석으로 대제학공의 가훈을 마음에 새기어 살아 온 충신이었으나 계유정난[수양대군]이란 난세를 만나 세상을 등지고 은거하여 살아 온 그 높으신 뜻을 후손들은 잊지 말지어다.


* 자료: 담양군지. * 조선 왕조 역사 사료. * 천안 전씨 대동보.

* 世界는 맞지 않아 기록하지 않았다.

* 가마실- 작은 절이 있는 마을.

* 대호군-태종,세종,세조 중기까지 있었던 무관 벼슬.

* 유물 - 당시에 참여하였던 종친들이 망인이 되어 알 수가 없다.

* 시대적 배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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