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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고 헐벗은 자의 이웃, 안성브니엘요양병원 박진하 원장

by JSS열린세상 2017. 4. 26.

가난하고 헐벗은 자의 이웃,

                      안성브니엘요양병원 박진하 원장


돌아가시기 전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부활과 영생의 소망 가운데 눈물을 쏟으시며 돌아가시는 어르신들을 보는 순간이 가장 보람있어...


안성브니엘요양병원

요즘 세상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 우리나라만 보아도 아픔의 현장들이 많고, 저 북녘 땅을 보아도 풀리지 않는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있으며, 눈을 세계로 돌려보아도 아픔의 현장들은 너무도 많다.


이 세상에는 어른들의 잘못으로 인해 죽어간 어린 생명들도 참으로 많다. 이런 아픔의 세상 속에서 조금이라도 아파하는 자들과 함께 아파하고 함께 웃는 사람이 있다. 바로 박진하 목사(58)다.


안성브니엘요양병원

박진하 목사는 금산읍 상리69번지에서 태어났다. 현재 금산 문화원 맞은 편 쪽에 그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금산의 작은 다리가 있는 곳에서 사진관과 가게를 운영했었다.


박진하 목사 부모님과 함께

그 후에 제원면 명암리로 이사를 하여 제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이후에 학교 진학을 대전과 서울로 하게 되면서 도시로 이사 가게 되었다. 현재 금산에는 큰집의 사촌 형님과 동생들, 그리고 작은 고모님 등이 산다고 한다.


필리핀선교 활동을 마치고 가족과 함께

그는 서울로 이사 간 이후에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까지 마쳐서 결국 목사가 되었다. 원래 어릴 적 장래희망은 목사가 아니었다. 어릴 적에는 영화배우가 꿈이었고 실제로 연극 등에도 자질이 있었다.


그리고 미술에도 재능이 있어 화가가 되고도 싶었지만 그러나 부모님이 모두 반대하셨고 결국 부모님의 바람대로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만약 인생을 새롭게 시작한다고 해도 목사가 되고 싶다고 한다. 그만큼 자신이 하는 일이 값진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경기도 안성에서 교회 담임목사, 요양원, 복지타운 원장 등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특히 이전부터 중점적으로 하는 일은 요양원과 복지타운 일이다.


그는 1990년 초, 교회를 개척하려 생면부지의 땅, 경기도 안성에 왔다가 안성의 큰 다리 밑에 알코올 중독자와 부랑자들이 헐벗은 채 먹고 자는 것을 보고 마음이 너무 아팠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을 데려다가 자신의 집에서 씻기고 재우고 먹이다 보니 소문이 났고 결국 안성 내 여러 관공서들에서 거리를 방황하거나 버려진 이웃들,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배회하는 사람들을 데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예상치 못했던 요양원 형태의 시설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고 그 후 성경에 나오는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함)이란 이름으로 공식적인 복지시설을 운영하게 되었다. 게다가 지금은 범위를 넓혀서 필리핀에 있는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생활용품 지원, 의료봉사활동 등 여러 사회봉사활동도 해오고 있다.


그에게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기억에 남고, 보람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제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1년에 수 없이 돌아가시는 어르신들의 마지막 임종을 홀로 지켜보는 일입니다.


오랜 세월 요양원에 계시다가 한밤중에 응급실로 가셔서 가족도 없이 임종하시는 어르신들을 혼자 보는 것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들입니다.


특히,돌아가시기 전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부활과 영생의 소망 가운데 눈물을 쏟으시며 돌아가시는 어르신들을 보는 순간이 저에게는 가장 보람된 순간입니다.”


물론 지금은 하는 일들이 자리를 잡은 상태이고 더 나아가 필리핀에까지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지만 인생이 그렇듯이 여기까지 오기까지 순탄치만은 않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안성 땅에 와서 교회를 개척하고 요양원 일을 하는 것도 외롭고 힘들었지만 믿었던 사람들에게 사기도 당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다시 일어서서 현재는 귀한 일들을 잘 감당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가 여기에 오기까지 그 초석을 놓은 분이 있다. 바로 그의 어머니이다. 그를 낳아준 어머니는 그가 다섯 살 때 지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 후 새 어머니가 오셨는데 그분은 그를 포함한 5남매를 헌신적인 희생으로 2014년 돌아가실 때까지 돌보아주셨다.


그의 집의 가산이 한때 기울어지기도 했었는데 그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교복을 사입을 수도 없을 만큼 어려웠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돈이 없이 늘 전전긍긍하시는 어머니가 너무도 불쌍하여 스스로 다니던 고등학교 기숙사를 뛰쳐나와 직업소개소를 통해 17세 어린 나이로 직장 생활을 했다.


하루20시간씩 일하여 당시 돈15만원을 모아 고향의 어머니께 가져다 드리고 나는 앞으로 가정을 위해 돈을 벌 것이라고 했더니 어머니께서 그의 손을 잡고 우시면서 “진하야 너는 공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목사가 되거라”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 후 그의 어머니는 그를 위해 집을 서울로 옮겼고 갖은 고생을 하며 그를 대학에 가도록 해주셨다. 그리고 결국 목사가 된 것이다.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서지 못했을 것이라고 고백하는 그는 롤모델이 누구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주저 없이 ‘어머니’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여전히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해하며 행복해하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이 코너에서 빠질 수 없는 질문을 했다. 바로 객지에 오랫동안 사시면서 고향에 대해 하시고 싶은 말이나 바라는 점이 있는지에 대해서다. 그러자 그는 대답했다.


“나의 고향 금산이 늘 그립습니다.
더욱 발전하는 금산이 되길 바라고 특히 어린 시절 살았던 그 금산의 정취가 느껴질 수 있도록 현재의 고향 분들이 금산의 금수강산을 잘 보존하고 지켜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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