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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골 풍경소리

나는 다만 나의 생을 살테요 - 사회활동가 김현칠씨-

by JSS열린세상 2017. 7. 14.

나는 다만 나의 생을 살테요

- 사회활동가 김현칠씨-

 


금산 중도리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낸 김현칠씨는 1980년 군 제대 후 광주5.18민주항쟁을 맞아 전두환 광주 살육작전이란 유인물을 등사 배포 한 것이 발각되어, 고문조작에 의한 반국가단체 아람회사건의 일원으로 많은 고통을 겪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로 인한 후유증과 국가에 대한 배상 청구 등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진행형이다. 사회활동으론 5.18민주유공자 충청동지회장을 맡았었고, 현재는 6.15 10.4 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또한 그는 퓨전국악그룹, ‘풍류를 조성환 대표와 함께 만들었다. 30대 초반부터 국악을 좋아 하던 터 대전시립연정국악원에서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그 후 명인 고향임 선생님으로부터 판소리 동초제를 사사 받았다.


퓨전풍악그룹은 12명의 정단원과 필요시 합류하는 협조단원 등이 있다. 조성환 대표는 공주 시립연정국악원 피리 선임 주자였다. 김현칠씨는 창작곡 부분에서 작시를 맡아 웃자’ ‘우여향’ ‘우리의 우정 사랑으로등의 곡이 탄생했다.

 

아람회 사건은 그의 인생에서 겪었던 가장 슬펐던 기억이다. 금산경찰서 정보과 요원들에 의해 양 손을 붙들리어 금산에서 출발하여 대전 대공분실까지 눈을 가리고 온 몸에 소름 돋는 지하실 계단을 내려갈 때는 마치 소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이었다. 34일간의 악몽은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 중에서 소위 통닭구이 라는 물고문을 가하면서 유인물을 전해준 사람들을 대라는 고문에 친구들을 지켜야 한다는 자신의 결심과 물고문의 압박 사이에서 가졌던 비참함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잊을 수 없는 슬픈 기억이며 위기였다. ‘국가가 나를 버렸다.’는 생각은 그를 가장 슬프게 하는 아픔이었다.

 

국가범죄로 판명난 200951일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조작된 사건으로 인해 옥고를 치르고 무죄판결이 나오기까지 아람회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와 재심재판을 위한 대법원 헌법재판소등의 약 14~5년에 걸친 재판과정(아직도 다 끝나지 않았음)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얻어진 세 번에 걸친 암 수술과 회복 및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한 투병생활이 있었다.


그가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것도 통일 되지 않고서는 언제라도 제2, 3의 아람회 사건이 재생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가 가장 큰 보람을 느꼈던 일은 작년 촛불집회이다. 백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서울역까지 걸어오는데 자신의 의지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떠밀려 걷는 것을 느끼면서 그것이 바로 민심이라고 생각했다. 정권교체를 염원하는 마음으로 모인 대한민국국민들. 작년 촛불집회야 말로 국민의 힘을 보여준 위대한 시민 혁명이었다.

 

중도리 건삼 전 골목은 더없이 기뻤던 기억이다. 지금은 좁다란 골목이지만 어릴 적 그에게는 커다란 축구장이었고 줄긋고 싸우는 가이생의 운동장이었다. 일을 마치고 거나하게 술취해 들어오시는 아버님을 맞이하고,


하꼬방만한 전축에 이미자 동백아가씨를 동네가 떠내려가듯 크게 틀고도 어느 누가 나무라지 않았던, 고향의 추억 보름날 소전다리를 나이 수만큼 걷던 그리운 그 시절의 추억. 그리고 힘들 때 아무런 조건 없이 의지가 되어주었던 고향의 친구들과 아람회 동지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그는 인생에는 절대의 법칙이 없다고 생각한다. 1010. 사람들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며 다른 꿈을 꾼다는 것이다. 이런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다만 하루를 메꾸어 가는 것이 인생이다.

 

새날         

김현칠

 

햇살 차는 아침

새날 선물이라

 

바람 차가워도

님 사랑 따스하니

새날 또 걸으리

 

내일 위한

믿음 안고 나를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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