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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의 역사문화 유적> 금산충렬사(錦山忠烈祠)

by JSS열린세상 2018. 2. 6.

<금산의 역사문화 유적>
오응정(吳應鼎), 그의 세 아들 그리고 손자를 기리는 금산충렬사(錦山忠烈祠)



금성면상가리에 있는 금산충렬사(충청남도문화재자료제17호)


금산읍에서 자동차로 대둔산로를 따라 금성면 상가리방향으로 가다보면 금성초등학교 못미쳐서 금산충렬사(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7호)  표지석이 서있다. 이곳이 바로 오응정, 그의 세 아들 그리고 손자를 기리는 금산충렬사다.


충렬문(외삼문)


3대에 걸친 다섯 분의 선열들을 추도하는 금산충렬사(錦山忠烈祠) 인근에는 1차 금산성 전투를 이끈 고경명 의병장을 기려 세워진 고경명 선생을 기리는 비석과 임진왜란 때 금산 전투에서 조헌 의병장을 비롯해 영규대사와 함께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순국한 의병 7백명의 위패를 모시는 묘역 칠백의총이 있다.


해주 오씨 삼대에 걸쳐 5명의 충신을 나온것을 기리는 삼세오충비


금산 충렬사(錦山 忠烈祠)는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에 있는 해주 오씨의 사당으로 '해주오씨(海州吳氏)의 삼세(三世)에 걸친 5명의 충신인 완월당(翫月堂) 오응정(吳應鼎.1548∼1597)과 큰아들 욱(稶), 둘째아들 직(稷), 다섯째아들 동량(東亮), (직의 아들인) 손자 방언(邦彦)의 충혼을 모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건물로 1831년(순조 31)에 세워졌다.?충렬사 외삼문 앞쪽에는 3세대에 걸쳐 5명의 충신이 한 집에서 태어난 것을 알리는 '三世五忠(삼세오충)' 비가 서있다.


충렬당


이 사우(사당)는 일제 말기에 일본 경찰이 갖은 책동으로 헐어버리려고 하였으나 금산 유림(儒林)과 오씨문중의 결사반대로 실패하고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으며,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해 매년 음력 9월 20일 이곳에서 제향(제사)을 올리고 있다.
 
오응정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조선 선조 7년(1574)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에는 전라도 순천부사로 순천을 수비하였으며, 같은 해에 왜적이 남원을 침입하자 남원성싸움에 참여했다가 첫째아들 욱, 다섯째아들 동량과 함께 전사하였다.


둘째아들 직은 1619년(광해군 11) 후금을 정벌할 때 강흥립(姜弘立)이 항복하자 백마를 타고 적진에 돌격하여 수많은 적을 죽이고 자결하였으며, 손자 방언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복하자 강에 몸을 던졌다.


<선조수정실록> 1597년 9월 1일자는 "적이 남원을 함락시키니 양원이 도망쳐 돌아왔으나 후에 중국에서 죽였다" "적이 남원을 함락시키니 총병(대장) 양원은 도망하여 돌아왔고, 총병중군 이신방, 천총 장표, 모승선, 접반사 정기원, 병사 이복남, 방어사 오응정, 조방장 김경로, 별장 신호, 부사 임현, 판관 이덕회, 구례현감 이원춘 등이 모두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어 "적장 평행장(平行長)과 평의지(平義智) 등이 군사를 나누어 진격해 와 성을 몇 겹으로 포위했다. 양원과 이신방은 동문에, 천총 장표는 남문에, 모승선은 서문에, 이복남은 북문에 있으면서 서로 협력하여 여러 날을 버티었다.


하지만 적들이 나무와 풀로 참호를 메우고 야음을 틈타 성벽 위로 올라와 탄환을 난사하게 되니 성안이 크게 혼란해졌다. 양원은 휘하 몇 사람과 포위망을 뚫고 달아났지만, 중국 군사와 우리 군사들은 모두 죽었다"고 기록했다.


남원 전투에서 오응정과 그의 장남 오욱과 5남 오동량은 같은 날 세상을 떠났다. 적과 끝까지 싸웠지만 너무나 중과부적이었던 탓에 결국 성은 함락되었고, 아버지 오응정과 두 아들 오욱, 오동량은 "왜적에게 포로로 잡혀 욕을 당할 수는 없다"면서 폭약에 불을 붙여 자폭해 죽음의 길을 택했다.


3세5충신을 기리는 유적지는 금산충렬사 외에도 전라북도 익산시 용안면 현내로 448-29의 '익산 삼세오충렬 유적'이 있다. 전라북도 기념물 61호인 이곳은 '3대에 걸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해주오씨 오충신(五忠臣)의 무덤과 사당 충렬사가 있는 곳이다


익산충렬사는 조선 숙종 7년(1681)에 세웠고, 오응정과 그의 아들 욱과 직, 직의 아들 방언을 모셔 사충사라 하였으나 근래에 오응정의 아들 동량도 함께 모심에 따라 오충사라 부르고 있다.


오응정은 조선 선조 7년(1574)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에서 공을 쌓았으며 임진왜란(1592) 때는 왕을 의주까지 호송하였다. 선조 30년(1597)에 아들 욱, 동량과 더불어 남원성 전투에 참여하였으나 참패하자 화약더미에서 아들과 함께 순절하였다.


이를 기리어 영조 35년(1759)에 용안에서 오응정을 제사하고 그에게 자헌대부 병조판서의 벼슬을 내렸다.

<인터넷자료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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